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롱 황제 (문단 편집) === 프랑스와 포르투갈에 원조 요청 === 완조(朝)가 방콕으로 피신한 후에도 본토엔 완조 지지자들이 남아있었으나 떠이선 왕조에 상대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완왕이 피신하자 응우옌호앙득, 레반꾸안도 그를 따라 방콕으로 도주했고, 그렇게 방콕으로 이주한 완조 신하들은 라마 1세의 자비로 마을[* 당대엔 용구(龍邱)라 했다. 이 마을의 터는 지금까지 남아있어 응우옌푹아인의 연호를 따 가륭촌(嘉隆村)이라 불린다.]을 이루게 되어 그곳에서 세력을 회복하였다. 응우옌푹아인과 그 일파는 용구에서 농사를 지으며 재기를 노렸다. 라마 1세도 응우옌푹아인의 군사력을 높게 사 외곽 수비를 맡겼으며, 시암과 [[미얀마]]와의 전투 때 응우옌푹아인도 참전하여 승리를 거둔데다 [[말레이]]의 해적들도 막아내어 응우옌푹아인의 입지는 기존보다 올라갔고 시암으로부터 받은 돈을 바탕으로 군사력을 정비하여 본토 회복을 노림과 동시에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에 지원을 요청하기로 했다. 응우옌푹아인은 피뇨에게 청하여 [[옥새]]와 자신의 아들 경(景)을 데리고 [[루이 16세]]에게 보낼 편지를 갖춘 후 프랑스로 떠났으며 돌아온다면 베트남에서 [[천주교]]를 선교하는걸 보장하였다. 사실 프랑스 말고도 [[필리핀]]에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피뇨가 보낸 사절들은 서산군에 붙잡혀 살해당했다. 1785년 2월 경, 응우옌푹아인과 피뇨 일행은 프랑스령 인도의 치리(治理)에 도착하였으나 프랑스는 베트남의 정세에 관심 없다는 뜻을 내비쳤다. 일행은 다시 [[포르투갈령 마카오]]에 사람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고, 이번에는 성사되어 포르투갈인들은 응우옌푹아인에게 군사를 빌려줄것을 약속했다. 이듬해 포르투갈인 안토니오가 약속대로 방콕으로 와 서양식 군대를 보여주었으나 시암의 라마 1세는 응우옌푹아인의 [[월권]] 행위에 반발하여 응우옌푹아인은 포르투갈의 지원을 취소하였고 이 일이 있고부터 시암인의 응우옌푹아인에 대한 신임은 떨어져갔다. 1786년 6월 피뇨 일행은 프랑스로 향했고 1787년 2월 파리에 도착하여 [[루이 16세]]를 만나 조약을 체결했고 프랑스는 군함 4척, 병사 1900명을 파견해 응우옌푹아인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응우옌푹아인은 프랑스에 타낭(沱㶞)섬을 넘겼고 프랑스에게 무역 특권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해 12월 피뇨 일행은 귀국하려고 했으나 27일 프랑스 본토에서 심각한 재정위기가 발생해 프랑스 정부가 파산 직전까지 몰리자 프랑스령 인도총독 토마스 콘웨이에 의해 상호 지원 조약은 파기되었다. 결국 피뇨는 자신의 인맥에만 의존해 프랑스 장교들을 모집하고 프랑스산 무기를 구입했다. 한편 베트남의 옛 완가 지지자들은 응우옌푹아인에게 편지를 보내 서산조가 내전에 빠진 상황이고 [[타이득]]과 [[꽝쭝]]이 대치중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또한 가정을 맡은 도독 등문진이 주력 부대를 이끌고 귀인[* 타이득의 영역권.]으로 진격했다는 소식도 전해들었다. 1787년 7월 응우옌푹아인은 신하들과 방콕을 떠났려고 했으나 이들은 떠나려는 순간 인근 원주민들에게 발각되었고 재정대신 고소정피아 박강(告訴了披耶·拍康)이 라마 1세와 이왕(二王) 마합 소랍신합나(玛哈·素拉辛哈那)에게 탈출 사실을 전달하여 마합이 격분한 상태로 그들을 쫒아갔다. 새벽에 소랍신합나가 해안 어귀에 있는 배를 보자 응우옌푹아인은 생명이 보장되지 않는다며 자살하려 했으나 신하들이 말렸고 결과적으로 탈출은 성공하였다. 응우옌푹아인은 부국도에 도착했고, 하희문(何喜文)[* 천지회(天地會) 일원.]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지금의 금구성(金甌省)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서산의 장군 완문장이 병사 300명, 군함 15척을 이끌고 응우옌푹아인에게 귀순했고, 완문인 등도 자신의 관할지를 응우옌푹아인에게 바치자 가정을 진수한 [[동정왕]]이 두려워해 팜반탐(Phạm Văn Tham, 范文參, 범문삼)만을 남기고 도망가버렸다. 응우옌푹아인은 타이득이 동정왕에게 보낸 편지를 위조하여 팜반탐이 간첩이라는 내용으로 꾸몄고, 의도적으로 팜반탐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되게 하였다. 그 편지를 받은 팜반탐은 군대를 이끌고 백기를 들어 억울함을 풀려고 했는데, 동정왕을 비롯한 군대들이 그 모습을 보고 팜반탐이 항복한 것으로 여겨 귀인으로 도주하였다. 이후 여러번의 교전 끝에 팜반탐을 처리하고 가정을 점령하여 광남국을 부활시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